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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져도 괜찮아, 마지막 한 번이 남았으니까
최가온 17세, 하프파이프의 새로운 여왕
2026년 2월 26일
우리 모두 넘어진 적이 있다. 시험에서, 면접장에서, 혹은 삶의 어떤 순간에서. 그런데 올림픽 중계를 보다가, 한 장면에서 멈춰버렸다. 17살짜리 소녀가 결선 첫 시기에서 크게 넘어졌다. 의료진이 투입되고 전광판에는 기권이 떴지만, 가온은 마지 막 기회를 위해 다시 꼭대기에 올라섰다.
최가온.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금메달 때문만은 아니다. 두 번 넘어지고도 세 번째에 다시 일어선, 바로 그 순간 때문이다.
Ⅰ
90.25
2026년 2월 13일 새벽,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 하프파이프 결선.
1차 시기, 보드가 슬로프 가장자리에 걸리며 눈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클로이 김이 다가와 어린 후배의 어깨를 두드렸다. 2차 시기, 또 넘어졌다. 순위판 최하위.
그런데 3차, 마지막 기회. 가온은 하프파이프 꼭대기에 섰다. 벽을 타고 올라가 공중으로 솟구치고, 회전하고, 착지하고, 다시 벽을 타고 올라갔다. 앞의 두 번이 없었던 것처럼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런이었다.
90.25점. 금메달.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자,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역대 최연소 금메달이었다.

ⅠⅠ
사실 가온이 처음 꿈꿨던 건 스노보드가 아니었다.
2008년 양평에서 태어나 TV 속 김연아를 보며 피겨를 꿈꿨지만, 아버지 최인영 씨가 못 다 이룬 하프파이프의 꿈을 보여주면서 7살에 보드 위에 올라섰다.
"파이프에 딱 들어갔을 때 너무 웅장하고, 타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때부터 피겨 선수가 되겠다는 걸 잊어버리고 스노보드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_Olympics.com 인터뷰
초등학생이던 가온은 제대로 된 코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려 했지만, 코로나가 하늘길을 막아버렸다. 갈 수 있는 곳은 미국뿐이었고, 이때 운명처럼 연결된 이름이 바로 클로이 김이다.
2018 평창 올림픽 하프파이프 금메달리스트 클로이 김의 아버지가 추천한 매머드 스노보드 팀. 가온이 자기 영상을 보냈더니, 코치의 답은 간결했다.
"바로 엘리트 팀으로 들어와."

이후 5년 넘게, 가온은 클로이 김을 오래 지도해 온 벤 위스너 코치 밑에서 훈련했다. 우상의 코치가 자기 코치가 된 것이다. 뉴질랜드 전지훈련에서 클로이 김을 처음 만났을 때, 부모님 없이 코치와 단둘이 간 어린아이에게 클로이 김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줬다.
"클로이 언니가 어린 저에게 말도 많이 걸어주시고, 매년 가면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하시면서 너무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_Olympics.com 인터뷰
김연아를 꿈꾸던 소녀는, 클로이 김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하프파이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ⅠⅠI
넘어지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다시 일어선다.
가온의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2023년 미국 애스펀 X게임. 14세, 월드컵 데뷔도 하기 전이었던 가온은 클로이 김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버렸다.

하지만 2024년 1월 스위스 훈련 중 허리를 다쳐 수술대에 올랐고, 동계 청소년 올림픽을 포기해야 했다. 하루 8시간 넘게 눈 위에서 쌓아 온 감각을 재활 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되찾아야 했다.
그래도 돌아왔다. 2025-26 시즌 월드컵 3연속 우승. 그리고 리비뇨 결선에서 두 번 넘어졌다. 하지만 가온은 이미 넘어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경험이, 수천 번의 엉덩방아가, 곁에서 지켜봐준 우상의 존재가, 세 번째 도전을 가능하게 했다.
ⅠV
우상을 넘어선 제자, 그리고 아버지의 꿈
가온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클로이 김이었다.

올림픽 3연패를 저지당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 어릴 때부터 품어온 제자였는데, 클로이 김은 가장 먼저 가온을 안아주었다. 시상대에서는 가온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넥워머를 내려주기도 했다. 우상의 기록을 깨뜨린 제자와, 그 제자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우상. 이 장면은 하프파이프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가온은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금메달을 자기 목이 아닌 아버지의 목에 걸어주며 고개를 숙였다.
"짜증을 내도 다 받아주는 아빠에게 너무 미안하고 감사해요."
젊은 시절 타보지 못했던 하프파이프의 꿈을 딸에게 건넨 아버지. 그는 "내가 더 미안하다"고 답했다.
V
즐기는 사람은 다시 일어선다.
가온은 올림픽 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올림픽의 성적도 중요하지만, 즐기고 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보드를 잘 다룰 줄 아는 선수라고 생각해서, 세상에서 가장 스노보드를 잘 타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기술을 잘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보드를 안정적으로 잘 타는 그런 선수로요."
_Olympics.com 인터뷰
즐기는 사람이라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걸까,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라서 끝까지 즐길 수 있었던 걸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결선에서 두 번 넘어지고도 세 번째에 완벽한 런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성적이 아니라 보드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었다.
넘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나면 되니까.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우리도 삶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얼마나 넘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일어서느냐가 중요하다.
본 기사에 인용된 최가온 선수의 발언은 Olympics.com 단독 인터뷰 및 국내 언론 보도에서 발췌·재구성했습니다. 기사 내 사실관계는 Olympics.com, 대한체육회, FIS 공식 기록 등 복수의 출처를 교차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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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Cindy
사진
인스타그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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